#돌아온홍당무
영어로 말을 못하니 어떤 질문에도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머릿속으로 버벅대며 문장을 만드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심장은 펌프질하여 내 얼굴을 빨갛게 만들었다. 나는 딱, 초등학생 때로 돌아가 있었다.
서울로 상경해 선배 회사의 팀장과 면접을 보고 첫 회식 때 였던가. 팀장은 나에게 이런말을 했다.
"얼굴에서 묘하게 자신감이 느껴지더라고"
나는 첫 회사에서 나름 탄탄한 경력과 실력을 갖춘 두분의 팀장님과 "제일 잘팔리는" 실력있는 대리 밑에서 약 2년동안 기초를 다졌다. 인턴쉽에서 내가 배정받은 팀에 계시던 두 팀장님이셨는데, 그 때 정말 피가되고 살이되는, 어디서 돈주고도 못배울만한 것들을 내게 알려주셨다.
첫 회사에서의 대부분은 대리 밑에서 실질적인 웹 개발을 배웠다. 물론 이도 피가되고 살이되긴했다. 당시 대리를 무척이나 싫어했지만 그의 실력만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내가 고작 2년 한것 치고는 괜찮은 실력을 가졌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팀장의 말대로 이상하게 잘 할 수 있을거란 자신감 같은것은 있었던 것 같다.
후에 다른 회사로 이직하고 나서도 함께 일했던 다른 부서 분들이 "소담씨 참 일 잘했는데" 라며 칭찬을 해서 덩달아 선배도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나 나름대로 자존감이 그리 낮지는 않았다는 거다.
그런데 영어가 내 자존감을 바닥으로 추락시켰다. 뉴질랜드 도착한지 일주일도 안되서 벌어진 일이었다.
수업시간에는 점점 말이 없어졌고, 내 입은 항상 닫혀있었다.
사실 나는 한국에서의 삶으로 부터 도망친 거였다.
뉴질랜드로 떠난 그 대장정의 시작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닌 그저 단순히 삶의 권태를 피하기 위한 도피였던 것이다. 그런데 공부..? 공부라고? 내가 공부를 해야한다니.
나는 공부와 그닥 친하지는 않았다.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정말 피터지게 열심히 공부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 대단한 수능도 나를 밤새게 하지 못했고, 나는 공부로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았다. 심지어 나는 누가 감독해 주지않으면 스스로 공부하지도 않고, 할줄도 몰라서, 학원을 빠지면 성적이 뚝뚝 떨어지곤 했다.
그런내가. 영어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는, 평생동안 겪어보지 못한 그 어떤 것 이었다.
어학원 기숙사에서 함께 지냈던 나의 첫 플랫 메이트들은 나의 동갑 친구들였는데, 특히 나의 룸메이트는 공부가 취미인 아이였다. 학원이 끝나면 집에와서 공부를 하고, 저녁에 약속이 있는 날은 아침을 먹기전 평소보다 좀더 일찍 일어나 공부를 하던 아이였다.
사실 이들이 없었다면, 나는 자극받지 않았을 것이다.
영어 공부? 전혀 하지 않았을것이다.
그들의 자극으로 나는 평소의 나보다 정말 오랜만에, 어쩌면 처음으로 무언가에 조금은 열심히 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나는 운좋게도 약 4개월이라는 기간동안 엘레멘터리 레벨에서 프리인터를 거쳐 인터 레벨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엘레멘터리 담임이었던 키위 쌤은 나에게 수업시간에 정말 열심히 한다고 칭찬해 주었다.
프리인터에서 인터로 올라갈때 담임쌤과 면담을 하였는데, 쌤이 말하길 나의 성적이 인터로 올라가기에는 좀 애매하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열심히 하기 때문에 내가 원하면 인터로 올려주겠다고 가고싶냐고 묻더라. 그래서 나는 말했지. 가고싶다고. 그랬더니 쌤이 알겠다며 만약 힘들면 다시 프리인터로 보내줄테니 언제든 얘기하라고 했다. 반을 3개를 거쳐서 그런지, 학원에 나를 모르는 학생이 거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심지어 옆방에 이사 들어온 아이들이 어퍼 인터 반이었고, 내 룸메를 포함한 한국인 4명이 어퍼인터 반에 있었으니, 정말 모르는 애들이 손에 꼽았다.
나중에 인터반 쌤이 Delia 가 정말 Famous 하다며 나를 놀려댔다.
신기하게도 공부할 수록 긴가민가 가물가물 했던 문법들이 기억나서 레벨테스트를 잘 쳤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인터반으로 올라갔어도 여전히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어느정도 알아먹긴 했지만 말을 해야하는 순간에는 4개월이 지난시점에서도 여전히, 말을 더듬어 대는 홍당무, 초등학생의 나 였다.
초등학생 티를 벗은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학원을 그만 둔 후 였다.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엄마의 발바닥 (0) | 2023.01.27 |
---|---|
워홀러라는 이름의 노동자 (0) | 2023.01.26 |
시작은 미약하나 (0) | 2023.01.24 |
하고 싶은거 다 하고 사는 미친놈 (0) | 2023.01.23 |
어떻게 하고싶은 것만 하고 사냐 (0) | 2023.01.21 |